북한산(北漢山) 김개남장군길
▲ 김개남장군길 4피치 등반장면
◈ 김개남 장군 길 ◈
1992년 10월 경원대학교 산악부는 권력과 외세에 반기를 든 근대 조선 민중의 대규모 저항이었던 동학농민혁명을 서사시로
형상화시킨 시인 신동엽을 기리기 위해 백운대 남서벽의 개척에 들어가 이듬해 봄에 길을 마무리 짓고 이름을 시인 신동엽길이라 지었다.
1994년은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되는 특별한 해였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해 혁명의 정점에 서있던 녹두장군과 김개남장군을 기리기 위해
그해 5월 녹두장군 길을 개척하고 뒤 이어 김개남 장군 길을 8월에 완성했다.
김개남 장군 길 은 총 등반길이가 약 170m밖에 안 되지만 거벽에 선 것 같은 느낌을 주고 벽 오른쪽은 까마득한 절벽이어서
아찔하기가 그지 없고 경사가 약해 보이는 벽도 붙으면 고도감이 상당한 릿지다.
동학혁명과 관련하여 특히 김개남은 별로 알려지지못했으나 혁명당시 만 뛰어난 용맹을 보이며 농민군을 이끌고 장렬하게 투쟁했고
정부군에 포로가 된 뒤 참수됐다.
그의 죽음에 관해 기록된 우리나라의 책은 거의 없다.
다만 영국 왕립지리학회 최초의 여성 회원이었던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가 1895년 1월 한국에 왔다가 우연히 그의 주검을 목격하고 짧게 기록한 글이
한국과 그의 이웃나라들 에 남아 있다.
원래 김개남은 양반 출신이었다.
20살때까지 유학을 공부하였으나 병서에 더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20살 무렵 전봉준이 이웃 동네에 이사를 오게되어 교류를 하게 되었으며, 동학 2대교주인 최시형을 만나 동학에 입문하였다.
이때 원래 이름 기범을 버리고 개벽세상을 만든다는 개남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동학란때는 남접의 전봉준과 더불어 북접주로서 이름을 날렸다.
전봉준보다는 더 급진강경파였으므로 나중에 현실파로 돌아선 전봉준과 갈등을 겪기도 하였다.
관군에 체포된 뒤 김개남은 즉결 처형을 당했으나 전봉준은 서울로 압송된다.
그만큼 김개남이 더 위험인물이었던 것이다.
릿지가는 길은 백운대산장을 지나 위문에서 우측 구파발쪽으로 돌계단을 내려서면 추락위험표지판이 보인다
표지판뒤로 10분쯤 오르면 넓은 테라스가 나오고 검은 물줄기 자국이 있는 대슬랩이 나온다.
바로 1피치 시작점이다.
1피치 (등반길이 30m, 슬랩 난이도 5.11a)
미세한 홀드의 연속으로 페이스다.
2피치 (등반길이 30m, 슬랩 난이도 5.10c)
V자형 페이스를 양발을 벌리며 스태밍을 적용시키면 쉽게 오를 수 있으며 이곳을 지나면 가파른 슬랩으로 이어진다.
슬랩 표면이 떨어져 나간 곳을 홀드로 이용해 등반한다.
볼트 몇개를 지나면 쌍볼트가 있으며 물길 초입이 된다. 큰 나무에서 확보를 봐도 좋다.
정확한 슬랩밸런스를 유지하고 발끝과 손톱으로 슬랩을 찍어 누르면서 천천히 오른다.
3피치 (등반길이 35m, 난이도 5.10a) 우측 턱을 넘어 슬랩으로 오른 뒤 크랙으로 진입한다. 비교적 크랙은 양호하며 우측으로 이동해 또다시 수직크랙을 따라 오른다. 제3피치의 쌍볼트가 없어 오버행 좌측 크랙 밑으로 박혀있는 볼트에서 확보를 본다. 3 피치는 직상 크랙을 레이 백과 짝힘으로 발을 크랙에 비틀어 찍으면서 오른다. 4피치 (등반길이 35m, 난이도 5.10a-5.10.b) 오버행 크랙을 올라서서 고정된 프렌드에 퀵드루를 걸고 몸을 우측으로 뉘이면서 크랙을 오른다. 크랙이 끝나고 우측으로 밴드를 따라 10여m 이동한 뒤 슬랩 구간을 직상해 오르면 테라스에 볼트가 박혀 있다. 5피치 (등반길이 30m, 크랙난이도 5.6) 우측으로 3m쯤 이동해 곧바로 올라가는 양호한 크랙. 크랙을 따라 큰 오버행 바위 밑으로 진입한 뒤 걸어서 백운대 정상으로 간다.
4 피치는 훼이스및 긴슬랩으로 완력을 많이 필요하며 좌우로 홀드를 찾으면서 올라야한다.
하강은 백운대 정상을 거쳐 신동엽길 방향으로 철주박힌 암릉을 150M 내려오면 샘터 아래 2피치 쌍볼트지점과 이곳에서 60M 하강하면 출발지점이다
도랫굽이